제5장

쾅!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홱 고개를 들었고,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5년 만이었지만 조금도 낯설지 않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도준, 당신…….”

박희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이미 탑승교로 들어선 두 아이를 바라봤다. 유리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에게 달려오려 했지만, 침착한 시후에게 붙잡혔다.

박희수는 시후를 보며 소리 없이 고개를 저었다. 시후는 늘 눈치가 빠르고 똑똑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박희수를 몇 번 쳐다보더니, 이내 유리를 데리고 인파 속으로 섞여 기내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이도준의 모든 신경은 그녀에게 쏠려 있어 아이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박희수는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칠흑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음침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박희수는 용기를 내어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는 5년 전과 똑같았다. 또렷한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깊은 눈동자는 심연 같았다. 온몸에서는 타고난 오만함과 고귀함이 뿜어져 나와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를 풍겼다.

이도준은 5년 만에 마주한 여자를 쳐다봤다. 흰색 원피스는 그녀의 가녀린 몸매를 감싸고 있었고, 큰 키에 드러난 종아리는 희고 매끈했다.

갸름하고 섬세한 얼굴은 5년 전보다 더 아리땁고 생기가 넘쳤지만, 짙은 고집이 서려 있었다.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는 지독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가 그녀의 눈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 어떤 감정도 상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이도준의 심장이 그녀의 눈빛에 세게 찔린 듯했다. 정체 모를 불길이 점점 거세게 타올랐다.

“박희수, 너 정말 대단하다. 5년이나 숨어 지내더니, 또 도망가려고?” 이도준은 화가 치밀어 조금도 부드럽지 않게 박희수를 줄에서 거칠게 끌어냈다.

“이거 놔! 이도준, 우리 이혼했어. 너 미쳤니?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고? 내 애를 임신한 채로 5년이나 도망쳤는데, 내가 물어볼 자격도 없다는 거야? 묻잖아, 애는? 그때 그 애, 어디다 숨겼어?” 이도준이 박희수의 턱을 확 붙잡았다.

박희수는 아픔에 이도준의 손을 인정사정없이 쳐냈지만, 남자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거세게 몸부림쳤지만, 벗어날 수 없자 분한 듯 이도준을 쏘아붙였다.

“이도준, 진짜 웃긴다. 그때 애를 원하지 않은 건 당신이었으면서, 이제 와서 애를 찾는 것도 당신이네. 왜? 윤명주가 애라도 못 낳아줘?”

“너!” 박희수의 말은 하나하나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하지만 그는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그는 당장이라도 이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희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당신이 날 병원으로 끌고 가서 뱃속의 아이를 지우게 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을까? 이도준, 절대 아이를 찾게 두지 않을 거야. 걱정 마. 당신이 그때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절대 아이가 당신을 아빠로 인정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

“이 미친 여자!”

이도준은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명 5년 전 그 상냥하고 현숙했던 얼굴인데, 지금은 날카로운 말로 구절마다 가슴을 후벼 팠다.

이도준의 길고 가는 눈이 가늘어졌다.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세차게 휘몰아쳤다.

“아이고, 씨발, 형.” 이경진이 허둥지둥 달려와 보니 두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주위의 기압에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두 사람 손에 칼만 있다면 서로를 찔러 죽일 기세였다.

“형, 형수님, 진정 좀 하세요. 무슨 일이든 잘 얘기하면 되잖….” 이경진은 말을 멈췄다. 이도준의 시선이 칼날처럼 날아와 박히자 두피가 저릿해지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거 놔.” 박희수가 발버둥 쳤다. “이도준, 이거 놓으라고, 이 미친놈아!”

이도준은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만 살았지. 박희수, 네가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 이 여자 데려가서 가둬. 언제 아이가 어디 있는지 실토할지, 그때 풀어줘.” 이도준이 싸늘하게 명령했다.

짝!

이도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맑고 경쾌한 손바닥 소리가 뒤따랐다.

다음 순간, 공간 전체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죽음의 기운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세상에!” 이경진은 이 순간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박희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분노와 설움이 전부 이 따귀 한 대에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파렴치할 수 있을까.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가두려 하는가.

이도준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이 여자가 감히 그를 때리다니!

“날 가두겠다고? 이도준, 이 짐승만도 못한 놈. 감히 날 가두기만 해 봐. 너랑 끝까지 갈 줄 알아.”

이도준은 혀끝으로 얼얼한 입안을 쓸었다. 주위로 위험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허…….”

남자가 돌연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도준은 손을 들어 여자의 뒷목을 움켜쥐고, 그녀를 자기 앞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갑자기 가까워진 잘생긴 얼굴에 박희수의 심장이 세차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침착하라고 되뇌며, 양옆에 늘어뜨린 손을 쥐었다 폈다.

“박희수, 우리 끝은 무슨.”

말을 마친 이도준은 그녀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렇다. 던진 것이었다!

박희수는 중심을 잃고 두어 걸음 비틀거리다 옆 난간에 등을 부딪혔고, 아픔에 숨을 헙 들이마셨다.

이경진은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싸움이라도 날까 봐 가슴이 철렁했다. 박희수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부축하려 했지만, 이도준의 눈빛 한 번에 제지당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손을 거두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옆에 서 있었다.

“끌고 가.” 그가 날카롭게 외쳤다!

결국 박희수는 이 남자를 이기지 못하고, 강제로 차에 태워졌다.

유리는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엄마가 나쁜 아빠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했었다. 엄마에게 더 폐를 끼칠까 봐, 물기 어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끝까지 꿋꿋하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나쁜 사람!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 엄마를 괴롭히고, 엄마를 데려가 버렸어. 오빠, 오빠! 엄마가 나쁜 아빠한테 잡혀갔어…….”

시후는 이 순간 지극히 침착했다. 어린 눈동자에 굳은 결심이 가득했다. 그는 평소 박희수가 유리를 달래주던 것처럼 유리를 품에 안았다. “유리야, 울면 안 돼. 유리야, 엄마가 우리가 울면 마음 아프다고 했잖아. 빨리 엄마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야 해.”

유리는 즉시 울음을 그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불쌍하면서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오빠를 바라봤다. “오빠, 방법 있어?”

“일단 집으로 가자. 이모 도움이 필요해.”

“응, 알았어. 유리, 오빠 말 다 들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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